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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 기획특집] 해외 독립운동 후손들을 찾아서... [제2편]

[광복절 기획특집] 해외 독립운동 후손들을 찾아서... [제2편]

by hstkcr 2019.08.09

독립운동가 서민호 선생의 후손 고 '서해룡' 회장

일제치하 한글 지켜 낸 독립운동가 서민호 선생의 차남
월파 서민호 '3·1운동, 조선 어학회'에서 독립운동 펼쳐’
해방 후 광주시장, 전남도지사, 4선의원, 대선 후보까지
자주독립 국가발전 공훈 2001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특집, 휴스턴 독립운동가 후손을 찾아서 2편에서는 일제가 한국민족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어 말살을 대폭 강화 할 때, 대표적인 한글 운동단체로 조직 된 ‘조선어학회’에서 독립운동을 펼친 월파(月波) 서민호(徐珉濠, 1903~1974)선생을 소개한다.
서민호 선생의 차남 고 서해룡(사진 아래) 회장(자유민주연합회)은 휴스턴 한인사회에서 잘 알려진 원로인사로 경기고(49회), 연세대학교(63, 법학)를 졸업하고, 국무총리실 근무, 휴스턴 연세대학교 동문회장, 명예회장, 연세대학교 미주 총동문회 명예 고문, 휴스턴 광복회원, 휴스턴 자유민주연합회장 등을 지냈다. 2년전 83세로 소천한 서 회장의 뒤를 이어 서민호 선생의 며느리이자 고 서해룡 회장의 아내인 서봉희 여사가 휴스턴 광복회원으로 활동중이다.
서민호 선생은 휴스턴 원로 한인동포로 잘 알려진 서석순 박사(1922-2017)의 친형이기도 하다. 고 서석순 박사는 과도정부시절 1960년 초대 국무원사무처 장관급 인사를 지냈던 인물로 연세대학교 교수, 동아일보 논설위원을 지냈고 휴스턴에서는 광복회원으로 활동했다.

중학생 신분으로 3.1운동 참여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따르면 월파 서민호 선생은 1919년 보성중학 3학년으로 3·1운동에 참여하였으며 반도목탁지(半島木鐸誌)사건으로 6개월간 투옥, 1936년에는 조선어학회의 사전편찬사업을 촉진하기 위한 비밀 후원회를 조직하여 거액의 재정지원 등 활동을 하다 1942년 10월에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구속되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조선어학회사건은 일제가 한국민족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어 말살을 대폭 강화하고 한글 운동자들을 탄압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 사건이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고 서민호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200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미국 컬럼비아대 정치학부 유학
항일 독립운동가이자 광복후 정치가, 사업가로 활동한 월파 서민호 선생은 1923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경학부(전문부에 해당)를 졸업하고, 1925년에 미국 오하이오주 웰스리언대학을 거쳐 1927년 컬럼비아대학 정치사회학부에 진학했는데, 미국에서 학업을 이어갈 때도 서민호 선생은 항일사상의 소유자로서 일제의 감시대상이 된다. 귀국 후 전라남도 벌교읍에서 남선무역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운영하였고, 1935년 송명학교(松明學校)를 설립하여 교장을 지냈다.

초대 광주시장, 전남도지사 역임
1942년 독립운동 지하조직이라는 이름으로 일제는 300여명을 검거하고, 그 중 주동자 33인 중 한명으로 지목된 서민호 선생은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1944년 2월 출옥했다. 광복 후 서민호 선생은 관선 초대 광주시장에 선출 되지만 해방정국 혼란기에 광주교도소에 수감 된 후 풀려나 1946년1월부터 10월까지 다시 3,4대 광주시장을 지내고 1946년 10월부터 1947년 7월까지 관선 7대 전라남도 도지사를 지낸다. (전라남도 역대 도지사는 1945년 광복 후의 도지사와 1948년 초대로 구분되고 있으며 광복 후 도지사는 대부분은 미국 육군이 관선 되었다.) 서민호 선생은 전라남도 도지사 당시 박철웅(조선대 초대 총장)과 함께 조선대학교 설립을 주도한다.

전남고흥, 서울 용산 국회의원 당선
이후 서민호 선생은 1948년 제1대 총선에서 한국민주당 후보로 전남고흥 국회의원으로 출마해 46.36% 득표율로 낙선 하지만 1950년 4년 임기의 제2대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출마 81.14% 득표율로 당선 된다. 이후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부가 붕괴 후 제2공화국 헌법에 따라 실시된 제5대 총선민의원선거에서 무소속 출마 전남고흥 국회의원으로 재당선 되고, 1963년 제6대 국회의원선거에는 용산구 국회의원으로 당선 자유민주당 후보로 유일하게 서울 지역구 국회의원이 된다.
제6대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입후보
하지만 서민호 선생은 제6대 국회의원이던 1965년 한일기본조약(한일협정)에 반대해 국회의원 사퇴 하고 1966년 5월 10일 민주사회당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되고 1967년 민주사회당을 대중당으로 개칭, 제6대 대통령선거에 입후보하였으나 신민당 윤보선과 야당후보 단일화를 위해 사퇴한다. 그 후 서민호 선생은 1971년 통일문제연구소를 개설하며 통일문제에 앞장서 활동하다 1973년 정계를 떠난 후 1974년 72세로 사망했고 그의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출신 정치인
서민호 선생은 1961년 제15차 UN총회 한국대표로 참석해 남북교류를 주장하다 입건 되었고, 1966년 민주사회당 대표최고위원 선출 당시에는 북한과의 문제에서 서신교환, 기자·문화인교류 등 남북간의 부분적 교류를 당의 통일정책으로 채택한 발기취지문을 발표했다.
같은 해 서민호 선생은 민주사회당 창당준비 대회에서 한일기본조약 폐기, 베트남 한국군 철수 등을 주장하며 “내가 만약 집권한다면 북한의 김일성과 국제기구를 통하거나 해서 면담, 대결할 용의가 있다”고 발언한 후 반공법 위반 협의로 구속되었지만, 정계 은퇴까지 통일문제에 앞장서 활동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 출신 정치인으로 알려졌다.
지난 2017년 소천한 휴스턴 원로 서해룡 회장은 서민호 선생의 3남1녀 중 차남으로 장남 서원룡씨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장남을 대신해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 살아갔다. 고 서해룡 회장은 휴스턴에서 한인자유민주연합 회장을 역임하며 북한문제에 대해 안보단체들과 함께 목소리를 함께 모으며 남남갈등에 대해 큰 우려를 보이고,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북한과 중국의 행태를 강하게 비판하며 한미일 결속과 한미동맹 공조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고 서해룡 회장의 아내 서봉희(사진 바로 위) 여사는 지난 5일 본지와 인터뷰에서 “시아버지는 우리나라를 위해 애쓰신 분이다. 자비를 들여 독립운동을 했고, 주변에서도 아버님이 살아 계셨다면 우리나라가 더욱 발전 했을 것이라는 안타까움을 전한다" 며 "이승만 대통령 시절과 박정희 정권에서 고난을 많이 받았다. 오죽했으면 손주들의 이름을 이승만을 다스리라는 뜻으로 '치리(治李)', '치승(治承)', '치만(治晩)'으로 짓게 하셨겠는가?”라며 광복 후 서민호 선생의 파란만장한 정치 역경을 상세히 소개했다.
서봉희 여사는 이어 최근 고조되고 있는 한국내 반일운동에 대해 “우리국민들이 감정으로 행동하면 될 일이 아니다. 수십년간 위안부문제 독도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렇게 감정을 건드려서는 안 된다. 우리가 이렇게 반일감정으로 감정적 대응하면 결국 국민들만 고통 받는다”며 우려를 표시했다. <동자강 기자>

※ 이 기사는 2019년 재외동포언론 지원사업 해외언론사로 선정된 코리아월드/휴스턴교차로 신문의 보도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역사 '독립운동가 후손을 찾아서' 주제로 작성 되었으며, 한국언론진흥재단에서 후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