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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 동안 벼르고 벼른 일, 시 쓰기"

"35년 동안 벼르고 벼른 일, 시 쓰기"

by hstkcr 2018.12.07

본지 컬럼리스트 ‘오광수’씨 시인 등단
본지 오광수 컬럼리스트(전 경향신문 문화국장, 편집기획위원)가 최근 시인추천 특별발굴로 <시인동네> 12월호를 통해 등단했다.
오광수 컬럼리스트의 대학 동기 이승하 시인은 ‘35년 동안 벼르고 벼른 일, 시 쓰기’라는 제목으로 오광수 컬럼리스트를 추천 했는데, 이승하 시인은 추천사에서 “대학교 동기생인 외우 오광수의 추천사를 쓰자니 몹시 저어 되고 한없이 부끄럽다. ‘등단’이라는 관문을 넘어서지 못하면 문인으로 인정해주지 않는 이 땅의 풍토가 못내 원망스럽다. 시집을 내면 시인인 건데, 등단 절차를 거치지 않으면 시인으로 인정해주지 않는 나라는 대한민국밖에 없다. 일본이나 중국도 공모전에 당선되거나 문예지상에 작품이 발표만 되면 문인으로 인정을 해준다. 우리는 문예지 신인상을 받거나 신춘문예에 당선되어야만 문인으로 인정해준다.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79학번 오광수는 재학 시절, 그리고 졸업 직후 신춘문예에 시를 투고,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신춘문예 최종심에 올랐다. 그의 필력을 아는 나도 다른 동기생들도 그가 등단할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은 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졸업 후 그는 언론사에 취직을 했다. 마감시간에 쫓기며 기사를 써야 했다. 사실에 입각해 육하원칙을 지키며 써야 하는 기사문은 그의 시적 감수성을 많이 갉아먹었다. 때가 되면 자동적으로 승진하는 것도 아니었다. 한 꼭지 한 꼭지 최선을 다해 썼지만 그의 마음은 추풍낙엽처럼 스산하였다. 시에 대한 꿈이 나이를 먹어갈수록 새록새록 더욱 움을 틔우는 것이었다. 이래서는 안 된다고 필사의 노력을 하면서 펜을 벼리는 오광수를 옆에서 지켜보았다. 그는 시를 다시 쓸 것이라고 공언하였고, 수십 편의 시를 보고 내게 보내주었다. 그런데 아직 부족하다며 시집 출간을 망설였고, 그러면서 세월이 또 흘러 5년이 되었다. 수정고와 함께 이번에 보내온 시는 더 이상 나를 망설일 수 없게 하였다. 《시인동네》의 지면을 통해 이렇게 등단의 절차를 거치게 되었다. 본인도 많이 쑥스러울 것이다. 등단 절차가 어찌되었든 간에 앞으로 해야 할 일은 첫 시집을 묶기 위해 밤을 홀딱 밝힐 일이다. 35년 동안 벼르고 벼른 일이 시 쓰기가 아니었던가. 첫 시집에 대한 기대가 크고, 두 번째 세 번째 시집이 속속 나올 것이다. 왜? 사실은 시를 계속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앞에서 나는 오광수 기자의 기사문 쓰기가 시적 감수성을 많이 갉아먹었다고 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등단을 했지만 작품 활동이 뜸한 아무개와, 시답지 않은 시를 쓰고 있는 나보다 훨씬 더 펜 끝을 날카롭게 벼리며 권토중래의 날을 꿈꾸어 온 오광수의 용기에 큰 박수를 보내면서 앞으로의 활동을 긴장감을 갖고 지켜보도록 할 것이다. 아아, 그가 나보다 시를 더 잘 쓰면 곤란하다는 생각을 종내 지울 수 없다.”고 전했다.
오광수 컬럼리스트는 “스무살 무렵엔 좋은 시를 쓰겠다고 몸부림치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는 세상을 뒤흔들 시를 쓰겠다고 생각했다. 또 세상의 위대한 시는 20대에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지만 세상 일이 다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수수깡 같던 몸매가 이스트 먹은 풀빵처럼 부풀어오르고, 장발이었던 머리카락이 허공 속으로 떠난 지금에 와서야 시인으로 '발굴' 되었다. 그 동안 사석에서 누가 기자인데 시도 쓴다고 하면 손사래를 쳐왔다. '시인'은 못되고 '쉬인'이라며 얼버무렸다. 뒤늦게 이리 된 것은 앞으로 시집도 내고 열심히 시를 써보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봐 주셨으면 한다”고 등단 소감을 전했다. <KW>